비가 온다 추적 추적..
벌써 며칠째인가. 겨울은 건기라 비가 별로 없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비올 때 물론 돌아다닐 수 있는데 해수면이 불어나면 그만큼 위험하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돌아다니는 건 금물이다. 덕분에 방값만 나가고 있다. 처음에 계약할 때 비오면 50%만 내기로 해서 그렇게 부담이 되지는 않지만 집안에서 할게 없는데 밖에도 못나가니 정말 죽을 맛이다. 건기 때 온 이유가 있는데 이렇게 추적추적 그저께 밤부터 내린 비 때문에 약이 올라 죽겠다. 그것도 왜 밤에는 그쳤다가 낮에만 오는지..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우리 일행 뿐 아니라 호주 여행자 몇명도 이 집에 갇혀 있다. 토마스라는 이름의 25살쯤 먹은 애가 있는데 담배를 얼마나 피우는지 창가에 의자를 놓고 앉아서 계속 담배만 피우고 있다. 백인들은 틈만 나면 상의를 벗고 있는데 이놈도 예외는 아니었다. 몸매가 좋은 것도 아닌데 항상 상의는 벗고 반바지만 입고 있다. 가슴이랑 배에 털은 잔뜩 나서 보기 싫은데 그렇다고 또 입으라고 하기도 모하고. 정말 민망한 상황이다. 토마스 보고 이 다음에 어디로 갈꺼냐고 물어봤다. "글쎄. 일단 한국이나 일본에 가서 영어 좀 가르쳐서 돈 좀 벌다가 태국에서 1년 쯤 살고 싶어." 이 놈은 내가 중국인인 줄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에 날 보자마자 "니 하오마"라고 했다. 백인을 보면 당연히 미국인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나라 사람과 별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내가 한국인이라고 밝혔더니 중국인과 일본인 중 어디일까 고민했었다고 했다. 한국도 알면서 말야. 톰에게 왜 한국으로 가냐고 하니까 그냥 한국에 가면 돈을 벌기 쉽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나도 가뜩이나 영어를 잘 못하는데 강렬한 호주 액센트로 들으니 상당히 깔아보는 듯한 인상이다. 한국인과 한국 둘 다. 그래서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단순히 돈벌이로 한국을 생각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빴다. 그래서 나도 "한국 사람들은 호주가 돈 벌기 쉽다고 해서 호주로 많이 가는데?"라고 했다. 그러자 그 녀석이 맞다고 하며 "그래서 호주 사람들은 편하게 살 수 있지 힘든 일은 한국사람들이 다 하니까"이렇게 말했다. 순간 정말 열이 받았는데 꾹꾹 참았다. 여기서 괜히 싸워봤자 나만 손해지. 시작한지 얼마 안된 여행인데 벌써부터 이렇게 싸움에 휘말리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나와 뜻이 안맞는 사람이 이 지구상에 얼마나 많겠는가. 한국에서도 많은데 하물며 말도 잘 안통하는 외국인. 그 말이 더 기분 나빴던 것은 그녀석의 태도 때문이었다. 다리를 꼬고 창가를 보면서 담배를 피우는데 말끝마다 담배를 한 움큼 빨아 창가로 뿜어내면서 코로 비웃는 꼴을 보니까 정말 한대 쥐어박고 싶었다. 그러지 않은 건 정말 대단한 자제력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녀석은 혼자 이렇게 여행을 다니는 구나. 불쌍한 녀석. 애써 그녀석을 외면하고 싶었는데 그녀석이 돌아서는 나를 붙잡았다.
"헤이. 나 나가서 먹을 것 좀 사오려는데 같이 갈까?"나는 몸은 돌리지 않고 얼굴만 돌리며 "쏘리, 암 비지 롸잇나우"라고 했다. 다시 돌아서 내려오는데 그녀석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짜증나게.
내려가서 티비 앞에 앉아있는 크리스한테 톰이랑 얘기해 봤냐고 물어봤다. 크리스는 독일인인데 여기 온지는 2주 정도 됐다. 계획대로라면 내일 보루네오로 간다고 했는데 비가 와서 계획이 좀 달라질 것 같았다. 아무튼 크리스도 톰을 별로 안좋게보는 것 같았다. "내버려둬 그런 자식."하며 아무말도 없이 티비를 봤다. 티비에서는 CNN이 나오고 있었는데 막 날씨가 나오고 있었다. 내일도 비.
치요꼬가 자기네 먹을 것 사러 가자고 해서 함께 나가기로 하고 방에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현관에 나가보니 톰도 옷을 걸쳐 입고 있었다. "놀랬냐?"라고 하며 아무렇지 않게 치요꼬에게 어깨를 두르고 우산 하나로 휑하니 가버렸다. 우산이 두개 더 있었는데 난 혼자 쓰고 가고 마린과 요리스 둘이 같이 쓰고 숙소 앞에 있는 식료품 점에 갔다. 비가 와서 사람들이 거리에 별로 없었는데 관광버스가 지나가면서 보니까 오늘 여기로 온 관광객들인가 보다. 불쌍한 사람들. 하필 오늘 같은 날 오다니. 오늘은 사원도 닫았을 텐데. 식료품 가게에 가니 빵이 있었는데 좀 눅눅했다. 말레이시아는 빵을 봉지에 넣어팔지 않고 밖에 내놓고 파는데 요 며칠 비가 와서 포장이 되어있지 않은 물품은 모두 눅눅해보였다. 미국에서 수입한 육포가 있었는데 먹을려고 했지만 생각보다 좀 비싸서 참았다. 어차피 태국에서 산 말린 복숭아가 있으니까 그냥 그걸 먹고 참기로 했다. 고기 먹은지가 며칠 된 거 같은데 언제쯤 먹을 수 있을라나. 저녁에 양고기라도 먹게 외식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3일째 제대로 밥을 안먹고 빵에 쨈을 먹었는데 그만큼 아꼈으니 하루는 몸보신을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참치캔 4개와 말린 새우 두 봉지를 사서 가게를 나왔다. 집에 바로 가려고 했는데 치요꼬가 들어가서 맥주를 마시자고 해서 그러자고 했다. 그래서 맥주 4병을 또 샀다. 맥주는 버드와이저밖에 없었다. 난 하이네켄이 좋은데. 어쨋든 집에 들어갔는데 애들이 모여서 영화를 보고 있었다. 상당히 예전 영화였는데 잘 이름이 생각 안 났지만 좀 있다가 보니까 생각났다. "스위트 노벰버"라고 키아누 리브스 나오는 영화였는데 더빙을 해서 말레이시아 말로 나오고 있었다. 얼마나 웃기던지. 한국말로 더빙한게 외국인들에게는 이런 느낌이겠구나 했다. 생각해 보라. 말레이시아 말을 하는 키아누 리브스. 웃고 떠들며 맥주와 함께 말린 복숭아를 먹었다. 아까 내가 새우 사온것을 보고 그걸 꺼내라고 말이 많았는데 내가 환전해 온 것이 별로 없어서 봐달라고 했다. 겨우 살았다. 새우는 내일 점심에 콴탄으로 갈때 버스에서 먹을려고 한 거라 절대 뺏길 수 없었다. 여행가서 친구들 만나는 것도 좋지만 퍼주다 보면 안사는것만 못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어서 조심해야 한다. 애들껀 얻어먹으면서 내꺼 아낄 수는 없어서 내도 남꺼 안먹는다.
내일은 아침에 일어났을 때 비가 좀 적게 왔으면 한다. 그래야 콴탄가는 길이 편하지. 비올때는 참..
오늘은 시내구경도 못하고 하루를 꼬박 쉴 것 같다. 며칠 째 걷느라 좀 피곤하기도 했는데 비가 와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가끔은 좋은데 제발 멈춰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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