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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사이(冷静と情熱のあいだ, 2001)

Creative JD 2017. 2. 27. 16:07


[냉정과 열정사이] (2001)


2001년에 이정일은 금요일 날 마다 우리 집에서 자고 갔다. 당시에 서울에서 자취하는 친구가 나 밖에 없어서 우리 집에서 자고 토요일에 같이 김포에 내려가곤 했다. 이정일은 있어 보일려고 지네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간혹 빌려오곤 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책을 우리 집에 놓고 김포를 갔다. 비오는 주말에 할 일 없이 집에 있던 나는 이정일이 놔두고 간 <냉정과 열정 사이>라는 책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빠져 들었다.


당시 정일이가 놓고 간 책은 <냉정과 열정사이 : Rosso>였다. 의도했는지 몰라도 냉정과 열정사이는 Rosso부터 읽는 게 좋다. Blu보다 Rosso에서 무엇인가 완성된 느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일본 최고의 작가 두 명이 2년 여간 정말 연애하듯 편지로 주고받으며 완성한 소설이다. 원래는 월간지에 한 작가가 한 회씩 격월로 연재하던 작품이었는데 연재가 끝나고 장편 소설로 낸 작품이다. 그렇기에 원래대로라면 남녀를 섞어서 조금씩 봐야하는데 그러기가 힘들다 또 그러면 좀 복잡하다. 무라카미 류 소설 중에 <쿄코>라는 소설이 하나의 커다란 이야기를 여러 명의 시선으로 전개해 나가는 데 책 자체는 되게 재미있는 책인데 초반에 정신없었던 것처럼. 그래서 Rosso부터 읽고 Blu를 읽는 것을 추천한다.


1. 보통 이런 원작이 있는 영화는 원작 소설의 팬들에게 엄청난 비판을 받는다. 책으로 자신이 상상하던 이미지와 다른 영상이 펼쳐지면 느껴지는 괴리감 때문에 기존에 자신이 갖고 있던 생각을 지키려고 영화를 무지하게 깐다. 하지만 이 영화는 원작이 엄청난 인기 소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오이의 캐스팅 때문에 욕을 좀 먹었고 생각보다 그렇게 많이 까이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환상적인 ost와 피렌체의 아름다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뭔가 완성된 듯한 결말도 그렇고.


2.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에서 여자 주인공은 항상 무미건조하고 존재감 없는 일상을 보낸다. <반짝반짝 빛나는>에서의 쇼코도 그렇고 Rosso에서의 아오이도 마찬가지이다. 항상 혼자 다니는 아오이에게 쥰세이는 빠져들게 된다. 아오이는 소설과 영화에 성도 나오지 않는다. 그냥 아오이(파랑-냉정을 상징). 쥰세이의 성은 아가타. 둘은 19살에 만나 불같은 사랑을 하지만 집안의 반대로 헤어지게 된다. 사실 집안의 반대로 헤어지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아오이는 이름대로 힘든 일을 끝까지 버티며 냉정하고 담담하게 살아가지만 가슴 속엔 쥰세이라는 열정을 항상 담고 있다.


3. 쥰세이(참고로 쥰세이는 순정이라는 뜻)는 고 미술품 복원사. 대학 때 사귀던 아오이와 헤어지고 다니던 전공(국문과)과 전혀 맞지 않는 고미술품을 복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 피렌체에 간다. 소설의 설정으로 초미녀(영화에서는 아님)인 메미라는 여자친구가 있지만 마음 속는 늘 아오이를 품고 있다. 언제나 열정적인 캐릭터이지만 하필 아오이와의 이별을 결정하는 냉정한 결정을 내리게 되는 아픈 캐릭터. 하지만 결국 10년 만에 아오이와의 사랑을 되찾기 위해 용기를 낸다.


4. 아오이는 타인에겐 냉정하지만 쥰세이에겐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처음으로 사랑을 하면서 그와 함께 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쥰세이의 아버지는 그녀를 집안의 재산을 노리는 여자로 오해해서 헤어짐을 종용한다. 거기다 다른 상처도 또 갖게 된 아오이. 결국 그 모든 상처를 밝히지 않고 쥰세이와 이별을 한다. 사랑만 갖고 살아가긴 참 힘든 세상인가 보다. 나라면 진짜 다 말했을 지도 모른다. 냉정은 아름다운 이별을 하게 할 수는 있지만 열정은 이별 자체를 막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름답지 못한 이별을 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진정 사랑한다면 나라면 후자를 택할 것 같다. 현실에서는 모르겠지만. 쥰세이는 자신의 현 여자친구가 있음에도 대놓고 아오이를 그리워한다. 메미는 그런 쥰세이가 싫지만 사랑하고 있다. 암튼 여자들은 좀 이상하다. 다들 나쁜 남자에게 끌리나 보다.


5. 아오이도 남자친구가 있다. 마빈이라는 외국인. 요새의 이런 멜로물에서 신기한 것은 라이벌이 나쁜 캐릭터가 아니라는 것이다. 소설이나 영화를 읽다보면 남자는 대부분 쥰세이에 공감하기 때문에 아오이의 현 남친이 미워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마빈은 나쁜 사람이 아니다. <500일의 썸머>에 썸머의 남편도 나쁜 사람이 아니며 <노트북>에서의 론도 나쁜 사람이 아니다. 아니, 실제로는 각각의 남자 주인공보다 더 좋은 사람일 수 있다. 더 이상 <이수일과 심순애>에 나오는 김중배 같은 나쁜 캐릭터는 없다(사실 김중배도 나쁜 캐릭터가 아니다. 이수일이 나쁜 놈이지. 순애 뺨때리고 발길질 하고..). 마빈은 아오이와 함께 살며 그녀를 사랑하지만 그녀에게 항상 무언가 공허함을 느끼고 그 공허함을 매번 섹스로 메우려한다. 그녀가 떠나갈 까봐 아오이와 더 열정적으로 섹스를 하는데 그녀가 적극적일수록 상처를 입는다. 몸을 갖는다고 해도 마음을 갖는 것은 아니니까. 마빈이 진정 갖고 싶은 것은 아오이의 몸이 아닌 마음이니까. 정말 힘든 사랑이다. 그녀와 긴 시간을 보내도, 끊임없이 섹스를 해도 마빈은 결국 그녀를 얻지 못한다.


6. 결국 둘은 서로를 잊지 못하고 다시 만나게 된다. 10년전 약속한 그날, 피렌체의 두오모에서. 이 소설 이후 피렌체의 두오모에 올라가는 계단과 꼭대기는 한글과 일본어의 낙서가 가득했다고 한다. 올라가는 계단이 생각보다 꽤 높은데 낙서의 90%가 일어와 한글이다. 영화에도 한글 낙서가 나온다(한국의 사나이, 李창호..라고..어떤 ㅅㄲ냐..진짜...) 암튼 두오모 꼭대기에 올라가서 보는 피렌체의 모습은 정말 아름답다. 생각보다 되게 좁은데 그래도 꼭 한번 올라가 볼 만한 곳이다. 영화를 보지 않은 채 소설만 읽고 갔을 때의 벅차오름이 아직도 생생하다. 참 좋았었다. 아오이와 쥰세이도 그 꼭대기에서 만나 둘의 사랑을 확인하고 내려와 사흘간 미친 듯이 사랑을 나눈다.


7. 영화와 소설의 가장 큰 차이점은 결말이다. 사실 소설에서의 결말은 뭔가 찜찜하다. 그래서 다시 만나는 거야 마는거야 인데 반해 영화에서는 확실히 만난다. 난 뭔가 이렇게 열린 결말보다 확실히 매조지 되어야 좀 안정된다. 상상하는 것은 때론 즐겁지만 뭔가 확실하지 않을 때의 상상력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8. 영화에서 OST가 피렌체의 배경과 기가 막히게 어우러진다. 특히나 마음을 울리는 현악기의 소리는 그 중에서도 탑이다. 요시마타 료 감독의 <The Whole Nine Yards>, <1997 Spring> 등이 영화 중간중간에 쥰세이, 아오이와 함께 등장할 때면 나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귀에 신경을 집중하게 된다. 이번 주 일요일(3월 5일)에 요시마타 료가 3년 만에 세종문화회관에서 내한공연을 하는데 정말 매우 매우 가고 싶은데 못 가게 되어서 너무 아쉽다.


9.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저만의 아오이와 쥰세이를 만날 것이다. 서로 사랑을 하고 그들 간의 약속을 하고 연애를 하면서 지켜야 할 룰도 만들고 한다. 그렇게 연인이 된다. 그게 서로에게 100%의 연인은 아닐 지라도. 하지만 그 사람을 정말 쥰세이와 아오이, 100%의 연인으로 만드는 것은 용기와 배려이다. 용기를 내지 못하면 기회를 놓치게 된다. 배려를 갖지 못하면 연인을 지치게 한다. <500일의 썸머>에서 탐은 결국 용기를 내었다. 냉정함 속에 열정, 열정 속의 냉정함을 잃지 말고, 그 상황이 오면 용기를 낼 수 있도록 살아가야지.


10. “나에게는 잊을수 없는 사람이 있다” - 쥰세이
“아오이, 나중에 나처럼 후회하지 말거라. 자신이 있을 곳은 누군가의 가슴 속 밖에 없어.” - 아오이
“완벽한 사람과 사는 게 꼭 행복하다곤 할 수 없어” - 아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