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화장대 식탁

Creative JD 2017. 5. 12. 20:39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

자취를 했는데 요새처럼 옵션같은 게 하나도 없었다. 가스렌지부터 티비, 세탁기 모든 것을 다 새로 샀어야만 했다. 돈도 없는데 그런 걸 다 새로 사야하니 너무 힘들었다. 그 때부터 난 사람들이 버린 물건들을 찾아보고 다녔다. 혹시나 게 중에 쓸만한 게 있는 지.

그러던 어느 비오던 날. 학교로 가는 길 중간 언덕배기에 어떤 아줌마가 화장대를 내놓는 것을 보았다. 가운데 커다랗고 타원형의 거울이 있고 서랍이 가로로 3개가 달린 체리목 화장대. 거울의 양옆은 보석함 같은 것이 달려있었고 거기에는 놋쇠같은 것으로 만들어진 손잡이가 있었다.

난 남자기 때문에 그 화장대가 필요없었다. 근데 학교로 가는 내 머릿속에는 계속 저걸 갖다 어따 쓰지? 하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빨래를 널까? 아니면 책상으로 쓸까? 그런 생각을 하다 학교에 도착해서 수업을 듣는데 내 머릿속에는 온통 아까 그 화장대 생각뿐이었다.
누가 가져가면 어쩌나. 스티커가 붙어 있었나? 비가 오는데... 아까 그거 나무인데 썩으면 어쩌나. 코팅은 되어 있었나? 이런 생각을 하니까 너무 가슴이 두근거려서 수업에 집중을 할 수 없었다. 결국 수업도중에 뛰쳐나올 수 밖에 없었다.

집으로 뛰어가는 길이 왜 그렇게 멀던지. 비오는 날인데 난 우산없이 다녀서 빠르게 뛰어갈 수 있었다. 이게 우산없이 다니는 것의 장점이다. 암튼 얼른 뛰어서 도착했는데...

그걸 어떤 할머니가 진짜 다 찢어진 우산을 쓰고 이리저리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얼른 가서.
"할머니. 이거 제건데 제가 버린 거에요. 근데 누가 달라고 해서요."
라고 말하고 할머니를 쫓고 내가 차지할 수 있었다.

비오는 날, 빗물인지 땀인지 모를 정도로 힘들게 낑낑대면서 집으로 옮겼다. 두개로 분리되는 거였으면 좋았을 걸 그것도 아니어서 어쩔수 없이 아주 짧은 거리를 옮기고 쉬고 옮기고 쉬고 했는데 그렇게 한 20분 넘게 걸려서 집에 가져올 수 있었다.

집에 형광등이 아니고 백열전구(오스람 이런것도 아니고 그냥 노란 백열전구..)여서 조명이 밝지 않아 그런가 훨씬 더 꾀죄죄해보였다. 거기다 비도 오래 맞아서 그런가 물을 먹어 가구 자체가 어두워보였다. 빨리 가구를 닦아야했다.

마른 수건으로 살살 닦는데 꽤 쓸만해보였다. 거울도 깨지지 않고 서랍도 열렸다. 집에 거울도 없었는데 잘됐다싶었다. 왜 버렸을까 이렇게 쓸만한 물건을. 하여간 사람들이 물건을 너무 막 버린다.

그날은 덜 말라서 그것을 사용할 수 없었다. 다음 날, 날이 쨍쨍해서 또 그걸 밖에 빼놓고 말려서 그날 저녁부터 사용할 수 있었다.

어따가 쓸까 하다가 내 화장품을 올려놨는데 딱 한개 뿐이라 의미가 없었다. 그렇다고 악세사리가 있던 것도 아니고. 그냥 책상으로 써야하나 했는데 위에 탁자공간이 너무 좁아서 팔 올리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결정한 화장대의 용도. 바로 식탁이었다.

난 식탁이 없었다. 그래서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밥을 먹거나 엎드려서 밥을 먹었다. 그릇도 하나씩 밖에 없어서 보통은 식기에 안먹고 조리기구째로 먹는 날이 많았다. 설겆이거리도 없고 좋았다.

식탁이 생긴 날. 저녁에 볶음밥을 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그 볶음밥을 접시에 놓고 먹었다. 곱게 잘 담아서 김치도 함께 담아서 화장대에 놓고 의자에 앉아 먹었는데 참 기분이 오묘했다. 왜냐면 거울을 보면서 밥을 먹기 때문이었다. 이게 웃긴게 혼자 밥을 먹는데 마치 누군가랑 같이 먹는 느낌이었다. 굉장히 부끄러웠다. 평소 내 얼굴을 잘 보지 않아서 그런가 어색하기도 했고 내가 숟가락을 들면 같이 들고 먹으면 같이 먹고 그래서 되게 웃겼다. 진짜 며칠간은 굉장히 어색했는데 어느 순간 편해졌다. 얼굴보면서 웃기도 하고 한숨을 쉬기도 하고. 재미있었다. 그렇게 며칠동안 그렇게 밥을 먹다가 갑자기 화장대 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결국 버릴 수 밖에 없었다.

집에 온지 며칠 되진 않았지만 정이 들어서 그런지 버릴 수가 없었다. 진짜진짜 힘들게 버릴 수 있었다.

원래 그런거 버릴라면 돈내고 신고를 하고 버려야하는데 돈이 없어서 화장대 다리에 테이프감아서 버렸는데 학교 갔다 와보니 누가 가져갔다 ㅋㅋㅋ

사실 있어도 쓸모없는 건데도 난 그런 걸 잘 버리지 못한다. 지금 집에 있는 것도 10분의 9는 버릴 것이다. 근데 버리지 못한다. 뭔가 잊는다는 것, 버린다는 것. 그런 것들이 난 무섭다.

쓰레기를 주워모으고,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고. 뭘 사도. 다 써도 꼭 이걸 어딘가엔 쓸 수 있을 것 같아서 놔두는 편이다.

지금도 집에 버릴 게 산더미인데.. 싹 버리고 싶은데 버리기가 힘들다. 마찬가지로 미련도 버리기 힘들고. 다 버리기가 힘든 것 같다.

힘들다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