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장맨
어렸을 때부터 난 짜장면이 좋았다.
국민학교 때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오른편에 청룡회관이라고 해병대가 운영하는 위락시설이 있었다. 목욕탕도 있었고, 이발관, 노래관, 식당이 함께 있었는데 입구에서부터 왠지 음침한 기분이 들어 들어가기 꺼려지긴 했으나 워낙 주변에 비해 가격이 쌌기에 가끔 가서 음식도 먹고 목욕도 했다. 머리를 깎은 적은 없다. 아마 깎았다면 해병대 돌격머리로 깎아줬을 듯.
기억나는 청룡회관의 짜장면 가격은 500원이었는데 맛은 평범했고 완두콩 3개를 올려줬던 기억이 있다. 항상 정확하게 완두콩이 3개였다. 모두 다. 갯수를 정확하게 세어서 넣었는듯..
청룡회관은 사실 꿈과 같은 곳이다. 목욕탕도 500원이었으며 짜장면도 500원이었다. 원래 그 때 일반 목욕탕의 목욕값이 1000원(소인 500원)이었는데 약간만 걸어서 청룡회관으로 가면 목욕에 짜장면까지 먹을 수 있으니 진짜 짱좋았었다. 노래방은 코인 노래방이었는데 당시에도 한곡에 500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비쌌다. 정말 옛날 노래밖에 없었으나 중2때 담임 선생님과 친구들 4명과 함께 가서 손지창의 "사랑하고 있다는 걸"을 부른 기억이 난다. 그 때 선생님이 나보고 잘했다고 칭찬했었다.
마송에는 참 여러 중국집이 있었다. 전통의 동해반점(친구네 아버지가 했던...), 우리 집 옆에 있던 배달 안해주던 중국집 향원, 금천루 등 전통의 중국집이 있었다. 6학년 때는 소방서 앞, 만달리 옆에 르네상스라는 경양식집(4층)이 있었는데 그 집 지하에 다래원이라는 중국집이 생겼다. 지하라서 좀 음습할 기운이 들 것 같았으나 당시 가장 최근에 생겼기 때문에 인테리어도 최신식이었고 그릇이 보통 중국집의 둥근 모양이 아니라 약간 길쭉하게 생긴 그릇에 나왔다. 다른 곳보다 짜장이 더 환한 갈색이었으며 아주 약간 단 맛이 나는 것이 특징이었다. 당시 다른 중국집의 맛과는 확연히 다른 맛이었으며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루트에 딱 있었기 때문에 친구들과 가끔 갔던 기억이 있다. 가격은 역시 고급답게 1500원이었다. 6학년 때 윤정아라는 친구의 생일에 남자4명, 여자4명(생일자 포함) 이렇게 초대를 받았는데 그 다래원에서 짜장면을 단체로 8명이 먹었다. 그리고 우리 8명은 모두 윤정아네 집에가서 방에서 남자 대 여자로 말뚝박기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는 진짜 험하게 놀았던 것 같다.
자꾸 그 때 생각을 하다가 이야기가 딴데로 새는데 다래원의 짜장면은 단 맛으로 어린애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동해반점은 전통의 중국집으로 내게 딱 짜장면, 하면 생각나는 곳이다. 여기 아들이 내 친구인데 걘 지네 집에서 짜장면을 절대 먹지 않았다. 이유는 질려서 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약간 느끼해서 그런 것 같다. 그 놈은 지네 집 짬뽕은 고등학교때까지도 잘 먹었다. 우리는 가게 주인의 아들의 친구라는 이유로 그 집에 가면 짜장면을 시켜도 탕수육이 서비스로 나왔었다. 하지만 진짜 돈이 없지 않으면 애들끼리는 그 집을 잘 가지 않았다. 동해반점은 어른들의 입맛에 맞춘 중국집이기 때문이었다.
동해반점의 짜장면은 너무 짠 맛이었다. 게다가 돼지고기 중 비계의 함량이 다른 중국집 보다 많아서 사람들에게 느끼하다는 평이 많았다. 나야 느끼한 느낌을 느껴본 적이 없지만 그것으로 유명한 집이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 먹었을 때는 또 먹을만 했다. 나름 클래식한 짜장면의 맛이랄까. 기름진 짜장의 고소한 맛. 딱 기본 짜장면이다.
마송에서 맛으로 가장 유명한 집은 역시 향원이었다. 우리 가게 바로 옆에 있는 중국집이었는데 마송에서 유일하게 배달을 안하던 집이었다. 가까운 곳만 일하시는 아주머니께서 철가방도 아닌 쟁반을 머리에 이고 배달해주던 곳. 리모델링을 해서 2층까지 있었는데 그 전에 한 층일 때부터 장사가 잘돼서 자리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향원의 짜장면은 맛이 진짜 좋았는데 다래원과 동해반점의 중간 맛이었다. 약간 단맛은 있지만 짜지는 않았던 그런 맛. 단무지(어렸을 때는 단무지를 먹었었다. 고등학교때부터 잘 안먹게 됨)와 함께 짜장을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었다. 약간 달달하면서 짠 단무지와 짜면서도 깊은 향이 배어나오는 짜장면. 난 짜장면을 진짜 빨리 먹었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향원 짜장면은 온도도 뜨겁지 않게 나와서 진짜 나오자마자 후루룩 먹었던 것 같다. 아직도 기억나는게 스무살에 공장 알바를 하고 첫 월급 받은 날 친구들 3명이랑 여자친구랑 같이 향원에 가서 이것 저것 시켜 먹었는데 그 때 너무 많이 시켜서 음식이 남았다. 이 때 내가 짜장면을 진짜 급하게 빨리 먹었는데 이 때문인지 탕수육같은 요리를 잘 먹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이 때 이정일이 진짜 미친 듯 많이 먹은 날이었었는데 ㅎㅎ. 향원은 특히 볶음밥이 맛있었다. 돼지기름에 고슬고슬하게 볶은 볶음밥에 짜장을 적당히 끼얹어 내놓는데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동해반점 볶음밥에 나왔던 후라이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참 맛있는 볶음밥이었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금천루는 맛으로 유명한 중국집은 아니었지만 당시 유일하게 시장골목에 위치하고 있어 지나가다 먹는 곳이었다. 특히 탕수육을 시키면 양을 너무 많이 줘서 항상 남기고 왔던 곳으로 기억이 난다. 아직도 거긴 진짜 양을 많이 준다. 근데 이건 향원도 마찬가지다. 탕수육 소짜가 다른데 대짜같은 그런 느낌이다.
고등학교 때는 요리왕이라는 중국집이 학교 바로 옆에 생겨서 수업시간에도 막 시켜먹었던 기억이 난다. 지구과학 시간에 내가 간짜장하나를 시켜 교실 뒤에서 먹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진짜 나쁜 학생이었다. 지구과학 선생님이 만만하니까 그 때 시켜먹은거다 솔직히 말해서. 다른 선생님이었으면 그런 생각 자체를 못했을 것이다. 수업시간에 짜장면을 시켜먹을 정도로 별난 놈이라는 세간의 관심을 얻고 싶어서 진짜 별 지랄을 다 했었다. 암튼 요리왕이 생긴 이후 고등학교 친구들은 다른데는 가지 않고 요리왕만 갔었다. 짜장이 맛있던 이유도 있었지만 바로 그 옆에 인터페이스라는 마송 최초의 PC방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른 이유를 떠나서 요리왕의 간짜장은 정말 맛이 있었다. 다른 곳보다 양파를 진짜 많이 넣어줬는데 갓볶은 양파가 하도 많아서 수북히 쌓일 정도였다. 거기다 고기도 많이 넣어줘서 진짜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약간 단맛이 있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짠맛이 강했고 돼지기름을 많이 써서인지 면을 후루룩 입에 넣었을 때 돼지맛이 강하게 났다. 무엇보다 요리왕에서 짜장면을 먹으면 양파냄새가 진짜 강하게 났었다.
모름지기 중국집이라 함은 문을 열면 플라스틱 발같은 커튼을 열고 들어가서 처음 맡는 짜장내음, 그리고 바닥은 금색 라인이 그려져 있는 쎄맨 바닥. 빨간색으로 칠해진 벽면. 그런 클래식한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그릇도 플라스틱 그릇으로 나오고 젓가락은 플라스틱 젓가락이면 금상첨화다. 요새 되게 좋은 그릇에 잘 담겨져 나오는 짜장면도 좋지만 가끔은 그런 중국집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중국집도 체인점이 많이 생기면서 이제는 동네 중국집을 잘 안가게 된다. 아무래도 맛에서 모험하기 싫으니까. 그래서 요새는 홍콩반점에 자주 가는데 이 곳은 짜장면은 그냥 그렇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탕수육이다. 가성비로 따지면 끝판왕이고 그냥 단순히 맛으로만 따져도 탑티어의 탕수육이다. 거기다 은근 양도 많아서 아무것도 안시키고 그냥 탕수육 하나만 싸와서 집에서 혼자 먹을 때도 많다. 쫄깃하고 달달하니 딱 내 취향이다. 한가지 단점이 있다면 포장을 하면 소스를 너무 조금 줘서 불만이다. 난 부먹 스타일인데 부을 수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찍어 먹게 된다. 이러다보니 탕수육의 본연의 맛이 느껴지지 않고 반쯤은 돼지고기 튀김으로 먹게 된다. 하지만 그것도 맛있다는 것!
오늘도 짜장면을 먹었다. 사실 올해가 시작하고 나서 밀가루 음식을 먹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는데 그걸 깬 것도 짜장면이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의 상당수가 밀가루 음식이다. 만두, 짜장, 파스타, 빵, 케익 등등. 그러다보니 진짜 피할 수가 없다.
사실 이제 밀가루 음식을 먹으면 안되는데도 계속 먹게 된다. 왜냐면..맛있으니까! 단순하다. 맛있으니까 먹게 된다. 또 내가 밀가루를 안먹으니 나와 같이 밥을 먹는 사람의 선택권도 좁아져서 피해를 주게 되니 그것도 꺼려지게 되고. 밀가루를 안먹고 오래 사는 것 보다 좋아하는 밀가루 음식을 실컷 먹고 행복하게 짧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이러면 오히려 더 행복하고 즐거워서 오래 살 수도 있지. 난 밀가루를 먹으면 도파민이 생성되니까!
암튼 난 오래 사는 것 보단 행복하게 사는 것을 택하기로 했다. 밀가루 만세!